와인을 마시는 이유 – 나는 왜 와인을 마실까?


드디어, 와인을 처음 마실 때부터 4년 간 써왔던 와인 리뷰를 내 온라인 기록장에 모두 옮겨 담았다. 2020년 5월, 초록병 희석식 소주만 마시다가 처음으로 와인을 마시려니 가격도 비싼데 꿀꺽 마시고 치우긴 아깝고, 와인을 잘 알고 싶기도 해서 뭐라도 적어두었던 게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Table of Contents


와인을 마시기까지

나는 원래 술을 좋아했다. 시끌벅적한 술자리보다는 술과 음식의 조합에 즐거움을 느꼈다. 그래봐야 삼겹살에 소주, 기름진 음식에 시원한 맥주, 짭짤한 마른 반찬에 달달한 막걸리 정도였지만, 그땐 그게 현실적으로 접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다른 나라 술을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도 자연스레 하게 되었지만, 내 돈 주고 사서 즐기기에는 내 스스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양주로 불리는 위스키와 꼬냑 같은 술은 TV에도 자주 나왔기 때문에 ‘비싼 술’, ‘좋은 술’로 알고 있었지만 가격이 부담됐다. 그 가치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이다.

위스키
가치를 알기 위해 마셨던 위스키. 기록 좀 남겨 놓을 걸.

우리나라 주류 문화도 조금씩 개선되고 있지만 ’20도 언저리의 소주가 1천원대인데, 40도 양주가 5만원이라고?’ 하는 인식은 지금도 많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그랬다. 누구나 좋아하는 분야가 있을 텐 데 그 깊이와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겉만 보고 판단하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만큼 가치를 받아들인 다는 건 중요하며, 공부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

그나마 위스키처럼 높은 도수를 가진 술은 몇 번에 걸쳐 나눠 마시면 나름 가성비를 따질 수 있다. 하지만 와인은 몇 만원씩 하는 걸 하루 이틀 내에 다 마셔야 한다. 예전의 나라면 ‘이 돈 주고 이걸 왜 마셔’ 라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잘도 그러고 있다. 너무 즐거워 하면서.


와인을 마시는 이유

그럼, 나는 와인을 왜 마실까? 관심 혹은 취미로 마시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삶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유가 뭘까?

먼저 와인 가격에 대한 허들은, 솔직히 가랑비 옷 젖듯 이라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내 만족을 위해서, 공부를 위해서, 가격을 조금씩 높이다 보니 지금처럼 5만원대 와인도 금액에 구애 받지 많고 집어 들게 되었다. 더 입맛이 올라가기 전에 그나마 이 가격대 와인에서 오랫동안 충분한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

가격은 그렇다 치고. 그럼 왜 와인일까? 지난 몇 년 간 적정 가격 선에서 여러 술을 마셔보았고 역시 가장 좋은 건 와인이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래처럼 생각이 이어진다.

  1. 나는 술을 좋아한다.
  2. 특히 입 안에 한 모금을 많이 머금고 맛을 즐긴 후 꿀꺽꿀꺽 삼키는 스타일이 좋다.
  3. 그러다 보니 증류주 보다는 발효주를 마실 때 더 즐겁다.
  4. 술의 원재료는 과일 아니면 곡물인데, 나는 과일 베이스를 좋아한다.
  5. 음식 특히 고기와 함께 마실 수 있는 술이 좋다.

여기까지만 생각을 이어가도 종착지가 와인 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곡물로 만든 발효주는 막걸리, 사케, 맥주 등 흔하지만, 과일 발효주는 거의 없다. WSET Level 1 수업에서 듣기로, 다른 과일은 양조용 포도만큼 당분을 충분히 뽑아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사과 증류주인 깔바도스도 증류하기 전에는 베이스 발효주를 만들텐데 그건 당분이 적나? 이건 공부를 더 해봐야겠다.

얼마 전 광명동굴에 놀러 갔다가 복숭아 와인을 맛봤다. 와 기가 막히던데. 다른 과일로 만든 와인도 충분히 맛있었다. 하지만 다음 주제의 이유로 포도 와인이 흥미롭다.


공부할수록, 알아갈수록 재미있는 와인

축구 경기는 재밌다. 그런데 왜 발로만 해야 하나? 그게 규칙이고 모두가 그렇게 인정하고 있으니까. 바둑도 규격화 된 바둑판에서 흑돌 백돌 만으로 둔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와인 역사는 아주 오래 되어서, 그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전통이 생기고 이를 보호하려는 움직임들이 생겼다. 그래서 많은 것들이 규격화 되어 있다. 예를 들면, 보르도에서는 까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 등 특정 품종으로 블렌딩 하고, 북론은 시라, 부르고뉴는 피노누아를, 끼안티 산지오베제, 뉴질랜드 소비뇽블랑 등 전통 혹은 판매량, 유행 등 다양한 기준으로 규격화 된 것이 많다. 그로 인해 공부/예측하기가 좋다. 물론 간간이 특색 있는 부분들도 있는데(예 : 슈퍼 투스칸) 그런 예외 사항들까지도 항상 공부하는 재미를 준다.

(국가의 통제도 있지만) 생산자들이 전통을 지키고 규격을 잘 맞추어 생산하다 보니, 시음자는 아무런 정보가 없어도 역으로 생산자/생산지역을 맞추는 기이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기후 등 자연 조건이라는 큰 전제 조건과 이미 소비자가 인식/기대하고 있는 특정 지역에서 유명한 품종 및 생산 방식이 굳어졌기에 가능할 것이다. 이런 요소로 인해 와인 공부는 시간 낭비 아니라 이름 그대로 공부가 되며 공부한 와인을 마실 때 얻는 지적 쾌감이 생긴다.

지적 쾌감만이 아니다. 감각적 쾌감도 있다. 와인은 본질이 술이다 보니 책으로 공부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래서 마시면 마실 수록 맛이 구분되고, 내 입맛에 맞는 스타일이 좁혀진다. 그 와중에 정말 마음에 드는 와인을 만나면 짜릿하게 즐겁다. 손 닿지 않는 곳이 간지러웠는데 시원하게 긁어주는 개운함이다. 또 책을 보며 공부했지만 여러 와인을 마시면서 공통점과 차이점에 선이 그어지고, 어느 날 책에서 본 것이 감각으로 느껴졌을 때도 아주 신난다. 산지오베제에서 느껴진다는 토마토 잎이나 마른 허브를 경험했던 때에 그러했다.


와인 취미의 아쉬운 점과 돌파 방안

아무리 재밌는 게임도 룰이 어렵다면 시작하기 어렵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이런 진입장벽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와인을 즐기지 못하고 그로 인해 즐거운 수다를 떨 상대가 내 주변에 없다는 게 아쉬운 점이다. 이건 개인 레벨에서 해결하긴 쉽지 않다. 커뮤니티에 가입하거나 흥미를 보이는 가까운 지인에게 끊임없이 와인을 공급하는 수 밖에.

일단 즐겨보기로 했다면, 진입장벽을 허물기 위해 유튜브나 책 등 좋은 자원들을 사용할 수 있다. 그래도 역시 비용을 들이면 한결 수월하다. 와인 전문 학원을 가보는 것이다. 나는 WSA 아카데미에서 진행하는 WSET Level 1 수업(링크)을 와인 생활 2년차 끝물에 들었다. 그동안 머리 속에 우겨 넣은 정보들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상쾌함을 맛보았다. LV1은 주말 1일 과정이 있어서 아내에게 딱 하루만 양해를 구하고 다녀올 수 있어서 좋았다.

지금은 LV2 공부를 하고 있다. WSET 공식 사이트에서 한국어 교재를 구매할 수 있다(링크). 시음이 포함되어 있어서 가격이 꽤 나가기도 하고, 강의 종료 후 몇 개월 안에 시험을 봐야 하는데 암기는 썩 자신 없어서 미리 훑어 놓으려고 한다.

WSET LEVEL 1 자격증
WSET LEVEL 1 자격증

다른 아쉬운 점은, 제대로 즐길 수록 올라가는 가격 부담이다.

사람들이 말하길, 레드 와인을 마시다 보면 그 끝은 피노누아 라고 한다. 그 초입에 들어선 지금의 내 입장에서 그 말을 풀어보면, 무거운 와인 보다는 가볍게(섬세하게) 여러 향을 뿜어내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약하지 않은 품종이 피노누아인 것 같다. 하지만 큰 아쉬움 없이 그 정도 섬세함과 풍미를 느끼려면 1병 당 10만원이 넘는다.

그래서 나는 무겁지 않으면서 충분히 좋은 풍미를 내는 시라와 산지오베제에 집중했다. 북론 시라도 너무 좋지만, 개인 취향으로 나는 끼안티 클라시코 그란 셀레지오네에서 아주 만족감을 느꼈다. 여긴 10만원 미만이다. 하지만 최근에 생성된 규격이고, 입소문이 계속 나면 밭 이름까지 붙는 그란 셀레지오네 와인들은 가격이 점점 오를 것 같다. 그럼 또 다른 와인을 찾아가는 수 밖에 없다.

혹은 와인 마시는 횟수를 줄여, 의미 있는 한 방을 만드는 방법도 있다.

내가 와인을 좋아하는 이유에서 몇 가지 항목을 조정하면 또 다른 결과물에 닿는데, 바로 막걸리다. 사케도 있지만 가격 대비로 보면 역시 막걸리가 낫다. 막걸리는 감미료를 탄 것이 1천원대, 무감미료에 제대로 만든 막걸리는 3천원대부터 시작이라고 보면 된다. 좋은 향과 맛, 질감, 산도까지 갖추고 있는 정말 좋은 술이다. 이걸로 주 중 와인 타임을 한두번 넘기면, 더 맛있는 와인을 마시는 주말을 맞이할 수 있다.

큰 잔으로 향을 맡으면 달콤새콤한 게 아주 좋다.

마무리 – 즐거운 와인 생활

처음 와인을 공부하고 한두달 지났을까? 와인 매장에 있는 라벨이 슬슬 읽히기 시작했다. 이건 품종이고 저건 지역이고 그건 와이너리고. 그러다 한두해 지나니, 이건 이런 맛이니까 패스하고 저건 그런 맛일 테니까 오랜만에 마셔봐야겠다 가 된다. 아직 와인 맛을 단어/용어 하나하나로 풀어낼 수는 없지만, 지금처럼 즐겁게 마시고 공부하다 보면 그런 날이 또 오지 않을까.

모든 취미는 즐거움으로 시작하지만, 몰입했을 때 한순간의 즐거움을 넘어서 감동의 영역에 도달하는 무언가가 있다. 낚시의 손맛은 유명하고, 축구에서 상대를 제치는 맛과 골 맛, 프라모델에서 아주 좋은 킷을 잘 완성 시켰을 때, 롤 게임에서 역전승을 했을 때 등이 그러할 것이다.

술, 알코올은 이러한 자극적 행복의 고전적 요소다. ‘실컷 마시고 오늘 기분 좋고 끝’이 아니라, 와인은 거기에 더해 지적 재미와 감각적 재미를 함께 준다. 다른 술도 그러하겠지만 앞서 언급한 와인을 마시는 이유에 부합한다면 이 좋은 술을 가볍게 즐겨보시길 권한다.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한 이유를 하나 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